교회 글
다윗의 기도
크로!
2011. 5. 27. 20:31
기도할 때나 목장 모임을 이끌 때 구사하는 나의 언어를 보면 세속적이다. 그래서 지난 달에 시편을 소재로 생명의 삶이 쓰여진다고 하여 기대를 많이 했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정확한 단어와 멋있는 표현을 배울 수 있을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순간 상황에 알맞는 어휘를 찾아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생명의 삶을 보지는 못했지만 다윗의 시에는 기대대로 멋있는 표현들이 많다. 그런데 그시편을 보면서 반성한 것은 다윗이 그처럼 미워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를 간구하는 악의 축에 저의 모습을 간혹 발견했다는 점이다. 비록 왕이 된 후에 죽을 죄를 저질렀지만 정직하다고 평가받는 다윗은, 또한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잘못도 없이 쫒겨 다니는 다윗의 젊은 시절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품성은 공의로운 모습으로 비춰질 것이다. 대학시절 같은 하숙방을 쓴 친구가 개혁을 위해 데모할 때에도 먼 발치에서 방관하고 있었지만 정의로운 세상을 꿈꾼 것은 사실이다. 그 때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마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리고 데모로 쫒게 다니는 신세였다면 다윗같은 시로 울분을 토로하지 않았을까? 주식을 이야기하고, 승진을 이야기하고,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속에서 세상을 살아 가는 처세술을 배울 수는 있는데 공의로운 하나님은 볼 수가 없다. 그 속에서 나도 변하여 적절히 거짓말하고, 그러므로써 보다 많은 이익과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약간의 규범을 위배하므으로써 우리나라 같은 경우 160%의 이익을 낼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 데모하는 친구도 승승장구하여 연예인 화보로 이익을 내는 것 같아 미울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그 추구하는 공의는 어디가고 알팍한 상술만 남아 있는지? 그래서 다위의 시편을 읽을 때 내 모습이 불쌍하다. 다윗가 같은 지도층에 서기 위해서는 높은 도덕율을 유지해야하지만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공의는 사치로 보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분으로 묘사하는 다윗의 기도가 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