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 고개를 쑥 내미니 이웃들은 벌써 떠났다. 서둘러 짐을 챙겨 넣고 여행에 나선다.
프랑스 프로방스지방의 산악도로는 멋있다. 길가에 늘어선 예쁜 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라벤더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꽃이다. 이런 꽃에서 추출한 향수가 유명하다고 한다. 좁은 길옆에 차를 멈추고 한 묶음 꽃을 꺾으니 차 안에 꽃내음으로 가득찬다.
마을의 건물에 중세의 고색창연함이 있다. 프랑스측 알프스의 기암절벽과 마을이 긴 세월동안 서로 닮아 온 듯하다. 이따금 속도를 내어 달리는 차에게 길을 비껴 주고는 천천히 달리며 풍경을 즐긴다. 내 평생 이처럼 멋있는 운전은 처음이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느티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든다.
이제는 니스로 넘어 가는 큰 산맥이다. 산등성을 타고 끝없는 길이 놓여있다. 간신히 차만 지나갈 폭이다. 오른 쪽 아래에는 아찔한 낭떠러지다. 건너편 산사면은 지층과 단층으로 채색되어 있다.
자연공부와 미술공부를 하는 사이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지중해다.
얼마 못 가 향수로 유명한 그라스가 언덕 위에 둥지를 틀고 있다. 싼 향수를 구할 겸 향수 공장을 찾았다.
이 지중해뿐만 아니라 동남아의 꽃도 가져다가 향수를 만든다. 용매로 추출하고 증류하고.. 등등 전역한 화학자가 귀 익은 용어다.
상표는 없지만 싸다는 꼬임에 서너 병을 샀다. 향수 비누도 샀다. 아무래도 프랑스에서 돈을 많이 뿌린다.
그라스에서 니스로 가는 길은 여름 휴가 때라 서울 시내 만큼 밀린다. 짜증난다. 고속도로를 타야 했는데..
니스 근처에서 캠핑장을 찾는다. 조용한 산속으로 향했다. 산 중턱에 위치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주인이고 장애인 같다. 손님들도 거의 없다. 되돌려 나왔다. 참 간사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별4개에서 3개로 떨어진 캠핑장에 짐을 풀었다. 잔디대신에 잡초다. 시원함도 없다. 모기 때문에 캠핑용 테이블에 앉을 여건이 아니다. 참 이 테이블은 노르웨이에서 샀는데 우리나라 수출품이다. 이것으로 돈을 짭짭하게 벌었다는 교포를 오슬로 교회에서 만났는데 참 인자한 분이다.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나민이 해민이를 세워 두고 기억을 더듬으며 지나 온 길을 알아 본다. 지리 공부를 할 양이다.
다음날 아침에 니스의 늘씬한 누드 미인을 즐기려 해안으로 간다. 선글라스를 준비해야 된다고 했는데...
자갈밭에 누웠다. 아이스크림 사 달라는 애들이 밉지 않다. 오가는 길이 즐겁기 때문이다.
두리번거리다 눈이라도 마추치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잘 못하는 수영이라 물을 마신다. 노르웨이 해안의 밍밍한 바닷물이 아니다.
경포대에서 웃통을 벗어 던지고 선탠을 즐기는 미래를 상상하며 옷을 집어 들었다.
해민이는 "나 생일인데" "나 생일인데" 노래를 한다. 최신 유행의 목걸이를 요구한다.
보행자도로에는 인파로 넘쳐 나고 길가에 음식점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아무래도 그냥 갈 수 없겠다. 해물과 밥이 섞인 빠에야와 피자를 주문했다. 여행 중 가장 비싼 음식이다. 해민이 생일 파티다.
조금 일찍 캠핑장으로 되돌아 가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보급품을 재정비했다. 빨래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