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교성이 별로다. 물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자 노력하지만 대화의 즐거움을 잘 알지 못한다. 국민학교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학교에서 노력 봉사를 했다. 산에 가서 밤나무를 심거나 화장실의 오수를 퍼내어 밭에 거름을 주는 일이었다. 물론 집에서 하는 노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화초재배가 취미였고 어린이들이 박력있기를 희망했다.
내성적이고 융통성이 없는 나는 선생님의 꾸지람을 많이 들었다. 또 더럽게 재수도 없었다. 열심이 똥통을 나르다가 쉬고 있으면 당장 나타나 게으르다고 기합을 받기 일쑤였다. 그런데 박력있는 애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건만 기합은 고사하고 칭찬 받았다.
박력있는 친구와 나는 같은 동네에 살아 학교를 파하면 6명의 친구들이랑 같이 다녔다.
그날도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은 날이었다. 마음속으로 박력있는 친구가 미웠다. 울분을 토해야했다. 그렇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 친구는 외가집이 오는 길목에 있어 간혹 외가집에 들리곤 했다. 그 날도 외가집에 간다고 했다.
갈래길이 나타났다. 그때 부터 나는 신나게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불공정하다는 투로 박력 친구를 지칭했다. 다른 친구들은 "그래도 그래도" 하며 나의 말을 막으려고 했다.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주지 않자 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제서야 아무도 말이 없었다.
결코 시원스럽지 않았지만 그만하지 생각하고 뒤를 되돌아 본 순간 박력친구는 외가집에 가지 않고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이후에 사이 좋게 지냈으며 다시는 사람이 없을 때 비난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대학 졸업할때 까지는.
요즘에 다시 욕을 한다. 누구하나 내 뒤에서 비난을 들어주지 않겠소. 그러면 50세까지는 사람이 될텐데.